국내 여행 ⛧ / / 2023. 3. 2. 14:19

등산 초보에게는 버거운 산, 천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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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날: 2021. 1. 12.
오른 산: 천마산 (경기도 남양주시)
날씨: 흐림, 눈
높이: 해발 812m
소요 시간: 3시간 40분 (10시 50분~14시 30분)
휴식 시간: 0분
난이도: ★★★
전경: ★★★★
만족도: ★★★★
주차비: 관리소 코스 앞 무료
입장료: 없음



아기가 돌이 갓 지났을 무렵, 거짓말처럼 등산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시부모님이 평일에 1박 2일 동안 호야를 봐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100대 명산 등반을 하러 갈 수 있겠다'였습니다. 블랙야크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을 오르려고 전부터 벼르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등산을 한 번 하려면 차를 타고 산까지 이동하는 시간과 산을 오르내리는 시간이 거의 하루는 잡아먹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호야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이라 막연히 바라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하게 기회가 빨리 찾아왔습니다.

호야를 맡기기 시부모님께 맡기기 전날 밤, 가까운 곳에 있는 100대 명산들을 찾아보다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천마산을 발견했습니다.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 등산 초보가 오르기 좋은 산이라는 리뷰를 보고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등산 생초보인 등린이답게, 평상시 외출 복장으로(^^;) 산을 찾았습니다.


천마산의 여러 등산로 중 처음에는 호평동 코스를 오르려고 했는데 주차장이 유료라 관리소 코스 쪽으로 더 이동했습니다. 그곳은 무료로 주차할 수 있어서 관리소 코스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라 녹지 않은 눈이 산을 하얗게 장식해주고 있었어요.

정말 오랜만에 올라보는 산이었어요. 초등학생 때 이후로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 온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산티아고에 갔을 때 높은 산들을 충분히 잘 넘은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큰 문제없이 산을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천마산은 산티아고에서 넘었던 산들과는 몹시 달랐어요. 산티아고의 산은 높기는 해도 길이 평탄해서 지형 때문에 난처했던 적은 없는데, 천마산은 (우리나라 산이 다 그런 건지, 아니면 천마산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가파르고 뾰족했습니다. 특히 흙으로 된 길이 아닌 바위 위를 지나야 하는 길은 저를 난처하게 했습니다.

등산로는 처음 1.2km 정도는 완만하다가 그다음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깔딱샘을 지난 다음에는 정상까지 능선을 타고 산을 건너게 돼요. 길게 이어지는 좁은 산등성이를 따라 걷는 동안 좌우로 드넓게 펼쳐진 전경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가파른 지형의 시작. 아직은 순탄합니다.
정말로 숨이 차서 깔딱거리고 있을 때 깔딱샘이 나타났습니다. 천마산의 진짜 모습은 이다음부터 시작됩니다.
깔딱샘 옆 벤치 아래로 구불구불 경사진 길이 보입니다. 날씨가 춥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잠시 앉아 쉬었을 것 같아요.
뒤로 넘어갈까 봐 손으로 같이 계단을 짚으며 올랐습니다. 사족보행의 시작이었죠(^^;).
정상까지 이르는 길은 이런 좁은 산등성이를 따라 걷습니다. 길 좌우로 확 트인 전경을 보고 있으면 아찔하면서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뾰족봉에 도착하기 전이에요. 저같은 등린이에게는 무척 난처한 순간입니다. 이때 정말 등산을 포기하고 싶었어요.



급하게 오게 된 산행이긴 하지만 너무 준비 없이 왔다는 후회가 조금씩 밀려왔습니다. 흙을 밟을 때는 괜찮은데, 돌은 눈이 얼어있는 곳들이 있어서 무척 미끄러웠어요. 등산화를 신었다면 덜 미끄러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때는 스틱 생각이 간절해졌고, 어딘가를 잡고 오를 때마다 손이 시려서 장갑도 필요했습니다.

뾰족봉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큰 바위들을 지나야 해서 꽤나 절절맸습니다. 어렵사리 뾰족봉에 오른 후에도, 정상은 아직 까마득했어요. 뾰족봉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 배터리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폰까지 꺼져버렸습니다. 이렇게까지 산을 올라야 되나 그냥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어요. 등산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용기도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천마산 정상석은 큰 바위 위에 있었습니다. 그때가 저의 가장 큰 고비였어요. 바위의 한쪽 귀퉁이를 올라야 했는데, 길이 너무 좁고 미끄러워서 도저히 지나가지 못할 것 같았죠. 미끄러지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서 돌 위에 한참을 엉거주춤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다행히도 정상석에서 막 내려오던 어떤 등산객 분과 딱 마주쳤어요. 그분은 한동안 저를 멀뚱히 보더니(등산 복장도 전혀 갖추지 않은 제가 그곳에 그러고 있으니 그분도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곳을 지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정말 그분이 없었다면 저는 정상을 코앞에 두고 그냥 내려올 뻔했습니다. 그분은 저를 도와준 것에 그치지 않고 장갑도 없이 그러고 올라왔냐며 자신의 배낭에서 여분의 장갑을 꺼내 주셨어요. 그때 제가 만난 건 등산객의 모습을 한 천사가 아니었나 요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산을 내려오는데, 산을 타는 다른 등산객들이 갑자기 전부 다르게 보였습니다. 얼굴에서는 선한 기운이 느껴지고, 몸은 건강해 보였어요. 어쩌면 등산을 즐기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뾰족봉입니다. 폭 5미터 정도의 땅만 위로 불쑥 높이 솟아있는 형국입니다. 360도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산 아래 펼쳐진 지형을 내려다보면 아찔합니다.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싸라기눈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눈이 왔다면, 그래서 정상에 있는 바위가 조금이라도 더 미끄러웠다면, 정말로 정상석에 가지 못했겠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과 마주치는 동안, 이 산의 꼭대기에 갔다 왔다는 성취감이 잔잔하게 마음속에 퍼져나갔습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만큼 성취감을 쉽게(?) 느끼게 해주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울적할 때나 자존감이 떨어진 것 같을 때는 산 정상에 오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골짜기 틈마다 작게 모여있는 마을들을 바라보며, 제가 아등바등 사는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천마산을 다시 검색해봤습니다. 이렇게 험한 산이 정말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다 하여 예로부터 소박맞은 산이라 불려 왔다."
"산이 험하고 봉우리가 높아 임꺽정이 본거지를 두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말 이성계가 이 산이 매우 높아 손이 석자만 길어도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 하여 천마산(天摩山, 하늘을 만질 수 있는 산)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천마산을 설명하는 말들은 제가 느낀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등린이인 저도 올라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눈이 얼어있지 않았다면 등산이 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는 말도 어느 정도 수긍은 갑니다.

개인적으로 꽤 요란한 100대 명산 첫 등반이었습니다. 다음 등반 때는 다른 건 몰라도 등산화는 꼭 준비해 놔야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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